진한 시대에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정책으로 인하여 박해를 당한 유가사상은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서한시대에 유가사상은 통치자들에게 채택되었다. 그 후부터 음양,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 이 6가 사상은 비교적 활발하였다. 그 중에 유가와 도가의 영향은 매우 컸다. 한나라 초기의 사회경제는 심각한 참해를 당하기 때문에 통치계층의 주요 임무는 생산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무위이치(자연에 순응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지다)를 주장했고 경제적으로 경요박부(노역을 줄이고 세금을 낮추다)를 실행했다. 한 무제가 즉위한 후 사회경제는 이미 회복하여, 이후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동시에 지주계층의 증가와 국력의 성장에 따라 농민에 대한 억압과 착취는 점차 심해져서 농민과 지주계층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그래서 정치, 경제적으로 전제주의를 강화하는 것은 통치자들의 절박한 필요로 나타났다. 하지만 무력만으로는 통치 할 수 없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인과 예에 대해서 항상 도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하는 데에 유학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유학자들은 군주가 예법을 따르고 모범적인 행동을 하면 덕을 얻을 수 있으며 그러면 국민들이 군주의 통치를 인정할 것이며 심지어는 존경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한 무제는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유교는 국가적 교학이 되어 그 지위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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