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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일 목요일

악의논리 북빙양의 지정학

기술의 발달로 북극해는 예전처럼 장애물이 아니다. 그래서 북극 지중해라는 말까지 나왔다. 사실 이 바다는 북빙양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소련이 이 북빙양 항로를 차지하기 위한 노력들은 그만큼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북빙양의 항로들은 주로 노르웨이의 베이킹들이었다. 현재도 북빙양 항로의 개척에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이 앞장 서고 있다. 8세기에는 바이킹이 진출하였고 15세기에는 예니세이강의 하구가까이까지 항로가 개척되었다. 16세기에는 북빙양에서 고래잡이가 시작되었다. 17세기 초에 러시아인은 오브강 하류의 시베리아원주민들과 교역을 시작한다. 18세기에 덴마크인 비터스 베링이 러시아 해군에 고용되어 1728년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의 해협을 남에서 북으로 통과하는데 성공하고 이 해협을 그의 이름을 따 베링해협이라 부르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와서 1879년 스웨덴인 노르덴쇨드는 그 민족의 조상 바이킹들의 염원처럼 처음으로 북빙양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한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극동진출을 위해 북빙양 항로의 개척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수에즈 운하를 경유하거나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도는 항로가 완전히 영국 지배하에 있기 때문이다. 1904년 노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 해군의 주력부대인 발틱 함대가 남아프리카 해안을 우회하여 극동으로 오는 6개월의 긴 항해가 아니라 위험성은 따르지만 북빙양 행로를 이용해 극동으로 왔다면 노일전쟁의 결과는 또 어떻게 바뀌어졌을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공산혁명 후 소련정부는 더욱더 북빙양 항로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북빙양 항로의 큰 단점이 있다. 매일매일 항해는 언제나 탐험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과 함께 북빙양의 중요성은 소련에 있어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되었다. 베링 해협은 독일의 잠수함도 얼씬 못하는 안전한 루트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해군함정이 북빙양을 경유하는 것은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특히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준양함 2척 구축함 13척 잠수함 12척 호위함 12척 등 도합 40여척의 대함대가 북빙양을 거처 극동으로 항해했다는 점은 북빙양이 군사적으로 유용한 지정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58년을 기점으로 미국과 소련의 원자력 잠수함들은 북빙양 항로 밑을 항해하는데 성공한다. 특히 기존의 유빙의 한계 때문에 항해가 제한적이였던것에 반해 원자력 잠수함의 등장은 북빙양 항해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일본입장에서 볼 때 북빙양 항로를 이용한 무역자금 지출 저하는 매력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이러한 북빙양 항로를 상용화 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항해 기간이 여름철에 한정되어있고 수많은 위험 해협이 있다는 점. 유빙 때문에 선박에 직접적인 피해를 많이 입고 이것을 충분히 수리 보충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는 다는 점. 거리로 보면 짧을지 모르지만 실제 항해는 운이 좋을 떄를 제외하면 인도양 항로보다 오랜 시일이 걸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소련 전체의 교통과 경제에 북빙양이 차지하는 비율은 별로 크지 않다 대부분은 시베리아 철도에 의존하고 있고 인도양항로를 의존하고 있다. 특히 눈여겨 봐야 할 점은 거리상으로는 인도양항로가 더 멀지만 수송 가격적인 측면에서 인도양 항로가 북빙양 항로보다 싸다는 점이다. 이것은 소련이 북빙양항로는 경제적인 측면보다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요성을 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의 이러한 적극적인 북빙양 항로개척과 북빙양에 대한 자기 주장은 선상이론에서 발견된다. ‘북극해에서 발견되는 대륙 및 여러 섬 중에서 소련 정부가 외국 영토라고 인정하는 것을 제외하고 소련방 북부 연안의 동서 양단과 북극점을 연결하는 자오선이 이루는 부채모양 범위 내에 있는 것은 모두 소련의 영토다’라는 이 주장은 소련의 북극해에 대한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이미 소련은 북극 방면에 방공군 50만, 방공전투기 3천 5백대, 레이다 4천기, 대공 미사일 1만발을 갖추고있다.
북빙양 항로에는 몇 개의 난코스 해협이 있지만 가장 변수로 떠오르고 있는 곳은 훗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의 쓰가루 해협이다. 이곳은 평소에 얼음이 얼지 않아 안전하지만, 유사시 일본에 의해 봉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변수로 손꼽히고 있다. 쓰가루 해협은 일본 영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은 국제 정세에 따라 소오야 쓰가루 쓰시마 세 해협을 봉쇄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이 볼 때 제 2차 대전 후 스탈린이 훗카이도 진주를 요구한 것은 단순히 영토확장이 아니라 훗카이도를 차지함으로써 북빙양 항로의 안전성을 도모하려는 계획도 포함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일본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홋카이도의 방위를 강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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