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소련이 주목한 곳은 극동공업지대였다. 이곳은 극동의 항구를 통해 배로 물자를 수송할 수 있고 소련의 프론티어 개발이라는 의미에서 1차 목표로 삼았다. 만주에 일본이 남겨놓은 대구모의 공업지대와 북한에 일본이 건설한 공업기반을 이용하여 극동에 사회주의 공동체의 위력을 보여주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만주와 관련하여 모택동은 소련의 의견에 반대했다. 심장지역을 개발하려는 소련의 전략에 만주를 포함시키느냐에 관한 문제로 중공의 간부 사이에 의견이 대립하고 그 때문에 많은 간부가 목숨을 잃었다. 중공의 협력 없이 극동 공업지대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공의 반대로 제 6차 5개년 계획은 3년 만에 중지되고 다음의 7개년 계획으로 넘어간다.
모택동의 거부로 극동공업지대 개발이 차질을 빗자 흐루시초프는 계획을 대폭적으로 수정하여 바이칼 앙카라 공업지대, 서시베리아 공업지대, 우랄공업지대 이 3개의 공업지대 개발 계획을 발표한다. 그리고 흐루시초프는 이러한 중공에 대해 경제원조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기술자도 모두 불러들여 보복을 했다. 1958년부터 시작되었던 이러한 중소간의 대립구도는 1960년에 이르러 표면화 되어 서방세계에까지 알려지게 된다.
한편 미국에서는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정부가 등장한다. 케네디 대통령과 포드자동차의 사장에서 국방장관으로 입각한 맥나마라에 의해 미국은 거대한 공업국가에 중대한 생태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힘의 균형에 의해 다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게릴라 활동에 소형으로 강력하고 기동성이 풍부한 통상병력을 강화하자는 전략, 즉 미국이 종전보다 통상 병력의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포명한 것이다.
소련은 쿠바에 핵 미사일을 들여놓는 계획을 실행했다. 미국의 행동을 견제하여 세계전략상 고지를 점하겠다는 소련의 이러한 계획은 바다 위에서는 아직 무력한 소련의 모습에 의해 실패되었다. 소련은 해군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번 사건으로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은 대 육군국이 대해군국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마한은 ‘어떤 나라도 대 육군국인 동시에 대해군국을 겸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일본의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인 해군국 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대륙 내부에서 대 육군을 형성하려고 함으로써 국가의 운명을 그르치고 말았다.
쿠바에서의 패배는 소련의 변화를 안겨왔다. 미소 평화공존에 의해 군사부담을 줄이고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미국의 맥나라마가 추진하고 있는 새로운 두뇌형성의 전략을 소련에도 적용해보자는 의견이 형성되었다. 인간의 심리적 반응 또는 사회적 현상을 모두 수량화 데이터화 하고 시스템화여 계산을 통해 시물레이션 해보고 거기서 답을 이끌어 내는 사고 방식이 공산당에 의해 실행되었다. 미국의 국방성을 중심으로 실험하기 시작한 기술전자정보사회의 관리와 경영통괄 수법이 소련에서는 국가보안위원회라는 악명 높은 비밀경찰의 손에 의해 국민을 통제, 감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소련은 심장지역을 강화하기 위해 시베리아 개발에 착수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가지는 커다란 약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수정주의 노선을 취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동시에 거대한 공업조직을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 두뇌 기구의 정비를 실시한 것이다.
소련의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시베리아 개발 계획이 축소해갔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력 부족. 둘째, 생산 규모의 증대로 원자재의 수요가 거대화 한 것. 셋째, 60년대에 들어서서 중소의 대립이 심화되어 중소의 무역이 감소일로를 보인 점. 넷째, 맥나라마 미 국방장관이 제창한 투자효용론이 국가계획위원회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브레즈네프 코시긴 정권이 내놓은 제 8차 5개년 계획은 유전개발에 주력하는 것이다. 모스크바에 가깝고 투자효력이 좋은 곳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유전개발에 주력하는 이유는 유럽 러시아와 동유럽에 에너지 부족 문제 때문이다. 에너지 수급의 균형을 되찾아 다시 영향력을 미치게 하기 위해 소련은 츄메니 유전지대를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지금까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석유공급은 소련이 독점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소련의 동유럽 지배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브레즈네프 코시긴 정권은 극동지역에 투자를 대폭적으로 삭감하고 모스크바에 가까운 우랄산맥근방에 집중했다. 이것은 심장지역 개발보다 림랜드(주변지역)에 군사적 진출을 본격적으로 지향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 9차 5개년 계획은 이전의 계획과 동일하게 서시베리아 유전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고 경영 정보 부문에 대규모 컴퓨터 시스템화를 도입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련이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에서 사이버네틱스나 조직공학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왔고 이는 미국과 소련의 컴퓨터 시스템 수준의 현저한 차이의 원인이기도 하다. 국가를 지배하는 데에는 획기적인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은 국민군을 편성하여 유럽을 석권했고 독일은 합동참모부 시스템을 개발하여 나폴레옹 시대의 개인이 주도하는 전쟁이 아니라 집단이 주도해는 조직적인 전쟁을 시행해 당시 유럽 최강의 육군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제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정보화 컴퓨터화를 통한 비밀 전략기구이다. 고도로 조직화된 국가전략 기구 없이는 세계전략을 전개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제 10차 5개년 계획은 1976년부터 1980년까지를 기간으로 정한 계획이다. 기존의 계획(석유개발과 정보산업의 육성)에 바이칼 아무르 철도건설에 힘쓰는 전략이다. 자세히 분석해보면 제 10차 5개년 계획은 전시경제이다. 소련의 예산계획은 군사예산을 교묘하게 각 분야에 분산시켜 숨겨놓았다. 민간투자의 신장률을 거의 제로로 만들고 남은 자금과 자재를 모조리 군수산업으로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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