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화론은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주장한 생존경쟁, 적자생존의 생물진화론을 인간사회에도 적용시킨 이론이다. 즉 약자에 대한 강자의 지배를 당연시하며 더욱 힘이 강한 나라인 유럽, 미국 또는 백인의 세계지배를 이론화한 것이다. 이렇게 논자들의 자의적인 해석과 전개로 19세기 유럽중심의 사회에서 백인종 주도의 세계지배 원리로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달과 제국주의의 팽창이라는 시대적인 분위기와 접합된 이 개념은 제국주의의 이론적인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일본에서의 사회진화론 수용은 1880년 전후였다. 일본의 대표적 사회진화론자인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1836~1916)는 사회유기체설로 애국심을 정당화시키면서 유교적 가족주의와 타협하여 현실의 일본국가를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통(皇統)’에 의거한 천황제국가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서의 사회진화론은 국가주의와 결합되면서 일본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중국에서의 사회진화론 수용은 1898년 엄복(嚴復, 1853~1921)이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천연론(天演論)』으로 번역하여 간행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중국에서 사회진화론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양계초(梁啓超, 1873~1929)에 의해서였다. 양계초는 그의 스승 강유위(康有爲, 1858~1927)가 해석한 중국 전통의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국가주의적인 사회진화론을 주장하였다. 국제사회에서의 생존경쟁에 승리하기 위하여 그는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고 국민을 통합시켜야 한다고 보았으며, 특히 사회진화론으로 제국주의를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는 중국의 나아갈 길을 바로 민족제국주의에서 찾았다.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사회진화론은 강자의 논리로 시작되었지만 약자가 강자가 되기 위한 이론으로도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는 사회진화론이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만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하나의 동인 역할도 하였다.
사회진화론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주로 1900년대 양계초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 한국 지식인들이 전혀 사회진화론에 대하여 이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80년대 초에 일본에 유학하였던 유길준은 미발표 논설인 「경쟁론」에서 인간사회는 경쟁을 통하여 진보한다고 보았으며 윤치호 역시 세계가 정의가 아니라 힘에 의하여 지배되기 때문에 ‘힘의 정의’라고 인식하였다. 이어서 1890년대에는 서재필과 윤치호가 주도한 『독립신문』이나 일본유학생들이 발간한 『친목회회보(親睦會會報)』등을 통하여 사회진화론이 알려졌다. 이렇듯 1880~90년대의 유학생과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일부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에 대한 일정한 이해가 있었지만, 그것이 널리 알려지고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지식인들은 주로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통하여 사회진화론을 소개받았다. 이들은 이를 통해 서양의 사조를 이해하고, 중국과 한국의 처지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에 주목하고, 사회진화론이야말로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한국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다. 그 후 그들은 1900년대 중반에 각종 신문과 잡지를 통하여 사회진화론의 내용을 소개하고, 한국인들의 분발을 촉구하여 ‘생존경쟁’, ‘우승열패(優勝劣敗)’와 같은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쓰이게 되었고, 이러한 개념들이 별다른 저항 없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진화론을 비판하는 시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였다. 20세기 초두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국가적 위기에 당면하여, 그 원인을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에서 찾았고 그것을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원리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국권침탈이 한국의 실력 부족에서 온 것으로 인식한 그들은 부족한 실력을 양성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나아가 열강과 같은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진화는 곧 진보로 이해되었으며, 근대화는 바로 진화이고 진보였다. 따라서 다른 민족, 국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지식인들은 한국이 실력양성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 다름 아닌 ‘교육’과 ‘식산(殖産)’이었다. 1906년에 설립된 대한자강회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또한 1900년대 후반에 전국적으로 무수한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실력양성운동의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즉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진화론은 처음부터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의 정치 사회적 목표와 연관되어 수용된 것이다. 대한제국기와 일제하의 지식인들은 우승열패와 생존경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의 세계에 직접 참여하자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점진론과 준비론에 의거하여 당장의 생존경쟁에서 적자성을 입증하기보다는, 현재의 부적자성 또는 열패성, 패자성을 인정하고 뒷날의 생존경쟁에서 적자로 부상하기 위한 실력양성에 몰두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수용된 사회진화론의 특징을 꼽으면 국가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개인과 개인의 경쟁도 언급되었지만, 경쟁의 기본단위는 국가였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처지에 놓인 현실은 국가를 앞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개인주의가 배격되었고 개인보다는 국가 또는 민족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국가와 민족을 우선하는 사회진화론은 나아가 민족주의를 태동시키기도 하였다. 유럽․미국 등지에서는 제국주의의 이론으로 자리잡았으나, 한국․중국․일본에서는 근대민족주의의 출발이라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사회진화론으로 인해 근대민족주의가 탄생한 과정을 살펴보자면, 우선 한말에 수용된 사회진화론은 당시 한국사회가 놓인 현실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지식인들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던 원인을 적자생존의 논리에서 찾고 그 상황을 극복하는 국권회복의 방안으로 사회진화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교육과 식산의 발전을 내세운 실력양성론은 그 방안이었고 이는 근대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또한 사회진화론은 개인보다 민족과 국가를 강조하는 국권론(國權論)을 유행시키며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국가를 우선으로 여기게 하였다. 이는 절박한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유교적인 전통과 접합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국가, 민족등이 부각되면서 근대국민국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민족주의가 크게 강조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논리로 제기된 민족주의가 국권론적인 관점에서 국수주의적인 요소를 갖추면서, 민족과 국가를 앞세우게 된 것이다.
이처럼 민족과 국가의 현실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측면에서 사회진화론은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다.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 생존경쟁의 이론을 받아들인 지식인들의 상당수는 일제의 침략도 그러한 논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또한 사회진화론의 근대 지향적인 논리, 즉 근대화에 집착하여 실력양성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겨 독립을 유지할 수 없는 실력이라면 차라리 일본의 지배가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하였고 의병항쟁을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실력양성운동은 국가를 중시하였던 것인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우선하고 개인을 희생시키는 점과 민권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국가주의 교육이 계속되어 획일화된 인간을 만들어내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지식층이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았던 우민관(愚民觀)도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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