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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일 목요일

갑걸문의 발견

갑골문 이제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는 것 다 한 우연한 발견에 때문이다.
지금부터 100년 전, 청나라 꽝쉬 25년 ,즉 서기 1899년에 발성한 일이다.그때는 사람들이 갑골문은 어떤 것을 잘 모르다.갑골 도 한 가지 약재이다.당시에는 땅 속에 있던 짐승 뼈를 롱구, 즉 용의 뼈라고 불렀는다.한 날 약재로 발견한 문인 뼈 조각 위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뭐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문인은 그것을 즉시 왕이롱에게 보여주었다. 베이징의 고급 관리로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 문자 해독에 남다른 식견이 있던 왕이롱은 그 뼈 조각을 보자마자 놀랐다.그것은 은나라의 문자, 주나라의 청동기 문자 이전에 존재했으리라고 전설로만 전해지던 바로 그 고대 문자였다.그때부터 그 물건의 발원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그 발원지인 허난성 안양시 시야오톤촌까지 번쪘다.(p.15)갑골문의 발견은 바로 니렇듯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갑골의 수는 약 16만 조각으로 추정되며 전세계 박물관에 흩어져 소장되어 있다.(p.19)그런데 그중에서 도 많이 가짜품있다.
이런 것 발견한 후에 왜 갑골문으로 부르는가?
갑골문,풀이하면 갑은 거북 뼈를 뜻하고 골은 짐승뼈를 뜻한다.문은 거북 뼈와 짐승의 뼈위에 새겨진 글자라는 뜻한다.
초기에는 이 갑골문이 은나라의 옛 땅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은허문자라고 도 불렀다.갑골문의 내용이 점을 치는 것들이었기에 복사라고 도 불렀다.(p.21)
1899년 갑골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중국의 길고 긴 역사의 시작인 하 왕조와 상 왕조를 두고 실제 존재여부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물론 문헌자료를 통한 하 왕조와 상 왕조가 존재하였다고 하더라도 발굴된 유물과 유적이 존재하지 않아 존재성 여부를 증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1920년대부터 시작되어 15차례 걸친 발굴된 갑골문은 상 왕조의 수도였던 은허인 지금의 하남성 북쪽 안양현이 그 출처로 상 왕조의 존재를 확인 시켜주었고 존재의 유무에 관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이렇게 발견된 갑골문은 거북이의 딱딱한 등껍질이 아닌 복부 껍질, 짐승의 뼈에 점을 친 내용과 결과를 새겨 넣은 글자를 말한다. 상 왕조의 왕들은 어떤 일을 할 때 항상 점을 쳐서 판단을 하였고 이 사실을 통해 당시 상 왕조의 의식과 정신세계를 알 수 있다. 상 왕조는 상제(上帝)의 의지에 따라 모든 일이 결정된다고 생각하였고 갑골문은 점을 치기 위한 행위의 기록이자 도구였다고 볼 수 있다. 점의 내용은 제사, 전쟁, 수렵, 재해 등이고 그 일에 대한 의향을 묻기 위해 행한 일의 기록으로써 제사에 관련된 기록이 유난히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시 여겼던 것은 선왕과 선비에 대한 제사였고 이 사실을 통해 왕조의 제사를 중심으로 보았던 상 왕조는 신정국가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상 왕조의 초기에는 왕이 지배씨족에서 교대로 선출되었기에 강력한 권력을 가지진 못했으나 당시 갑골을 가지고 점을 치는 사람인 정인이이 있었음에도 점을 통해 나타난 결과의 길흉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왕으로 보았다. 즉 상 왕조의 왕들은 신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유일한 매개자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인 성격은 점차 약화되어 갔고 상 왕조의 왕들은 혈연관계를 통한 계승으로 왕권의 전제적 성격이 강화되어갔다.
또 하나 갑골문의 흥미로웠던 점은 갑골문에 새겨진 글자들이었다. 한자의 기원은 중국 황제의 한 사관이 새발자국 모양에서 글자를 만들었다고 하나 현재 가장 근거 있는 기원으로 이 갑골문을 꼽고 있다. 갑골문은 이미 상당히 발전된 문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상형성도 매우 줄어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갑골문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면 현재의 한자가 왜 지금의 모양을 갖추게 됐는지를 짐작해보게 하는 글자들이 많다. 그에 대한 예로 象자도 갑골문에는 실제 코끼리 모양과 비슷하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을 통해 보면 이 당시 사람들이 코끼리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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