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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4일 토요일

창덕궁 답사기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울시는 곳곳에서 문화 유산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유학생으로써 서울에 대한 존경과 기대감이 항상 존재해왔다. 이번 답사숙제를 받고 우리에게 친숙한 드라마 대장금이나 명성황후를 통해서 아는 궁궐을 직접 본다는 생각이 생겼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의 창덕궁을 답사지로 선택하게 되었다.

창덕궁은 1405년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입진왜란이후에는 소실된 경복궁을 대신하여 약 270년간 왕조의 중심 궁궐로 이용되었다. 특히, 비원으로 잘 알려져 있는 후원은 정자와 연못, 괴석, 수목이 어우러져서 아주 아름다우니까 많은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 시대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궁궐이며, 자연과의 조화와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학교에서 출발해서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에서 내렸다. 안국역에서 나와 몇 분을 걸어 창덕궁 앞에 도착했다. 표를 끊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인정전-선정문-희정당-대조전-비원의 부용정-연경당-낙선재-어차고’를 순서대로 답사했다.

창덕궁의 입구인서돈화문을 지나 가이드의 안내로 제일 처음 간곳은 인정전이다.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조회,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행사가 거행되었던 곳이다. 인정전 앞에는 넓게 잘 닦여진 돌길이 있었는데 이는 삼도라 한다. 가장 중앙은 왕도로 왕이 다니는 길이고, 양옆에 각각 무관과 문관의 길에 12개씩 자신의 지위에 맞는 위치가 정해진 돌이 놓여있었다. 나는 왕이 다니는 길을 통해서 인정전으로 들어갔는데, 마치 내가 왕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살짝 들었다. 인정전의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일층이었다. 다만 천정만 높았는데 이를 통층 구조라 한다고 한다. 인정전의 내부는 통층 구조 말고도 놀라운 것들이 많았다. 높은 단위에 있는 용좌와 그 아래 계단, 그리고 반질반질한 마룻바닥과 샹들리에 등, 내가 생각해왔던 궁궐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었다. 붉은 색과 황색의 휘황찬란함이 중국의 어느 영화에서 본 듯하기도 한 그런 느낌이었다. 1908년 전기가 들어오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궁궐에 등이 밝혀졌을 그 때의 상황을 상상해보며 선정문을 지나서 선정전으로 향했다. 선정전은 임금이 평상시 신하들과 국사를 논의하고 경연을 행하던 곳이라 한다. 선정전 안에는 인정전에서 보았던 그림이 또 있었는데 이는 일월오악도로 임금님이 계시는 곳에 항상 있는 그림이라고 한다. 임금님 계시는 곳에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예수님이나 부처님 뒤에 항상 표현되는 그런 후광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또한 선정전은 인정전과는 달리 높은 단위에 용좌가 놓여있지 않고 임금이 바닥에 책상다리로 앉게 되어있었다. 이는 신하들과 마주보며 국사를 논하기 위함 일 것이다. 선정전은 그 내부의 설명보다는 외부의 설명이 강조 되었다. 이는 선정전의 기와가 현존하는 유일한 궁궐의 청기와 건물이기 때문이다. 청색기와는 제한적으로 사용되는데 궁궐의 중요 건물과 사찰에만 쓸 수 있다고 한다. 매우 깔끔하면서도 아름다운 기와의 색에 감탄하였다. 청기와의 아름다움을 뒤로 하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선정전이다. 선정전은 임금의 처소이며 어전 회의실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건물은 1902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희정당의 내부는 샹들리에와 외제 가구들로 장식 되었는데 이는 프랑스제 가구라 한다. 희정당의 남행각 정문은 자동차가 들어 올수 있게 변형 되었다고 한다. 궁궐 안에 자동차까지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이제껏 봐왔던 전기등불이나 외제 가구들보다도 훨씬 놀라웠다. 답사를 거의 마칠 때 즈음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희정당과 어차고는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희정당을 뒤로하고 대조전으로 갔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서온돌에서 왕비가 머물고 동온돌에서 왕이 머물렀다고 한다. 대조전은 다른 전각과는 달리 용마루가 없었는데 이는 왕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이 위에 있으면 안 된다는 이유이다. 그리고 남녀의 화합장소에 용이 위에 있으면 맥이 끊기 때문이다. 1926년 동온돌에서 순종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대조전의 내부는 자개라는 중국가구와 외국의 마루로 장식 되어있었다. 1917년 대화재 이후 1902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 지은 이유에서인지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커다란 쇠그릇을 보았다. 이것의 이름은 드무라 하며 화제시에 물을 잠아 놓는곳이라고 한다. 사실 물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실제 화제에 쓰기 위한 것 보다는 불귀신이 도망가라는 주술적 의미가 강하다고 한다. 다음으로 궁궐의 온돌구조를 보기 위해 대조전의 우측을 지났다. 대조전의 마루 밑쪽에 작은 문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 온돌에 불을 뗄 수 있게끔 되어 있다고 한다. 궁궐 안에서는 장작으로 불을 떼면 단청이 그을리기 때문에 숯으로 불을 뗐다고 한다. 연기는 굴뚝을 통해 빠져 나가 게 되어있었는데, 이 굴뚝은 보통 굴뚝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보통 굴뚝은 그냥 연기를 빠져나가게만 하는 용도로 쓰이기 때문에 어떠한 장식도 있지 않지만, 여기서 본 굴뚝은 길한 것으로 여겨지는 십장생으로 표면이 장식되어 있었으며 모습 또한 대단히 아름다웠다. 굴뚝 하나에도 이렇게 멋진 장식을 하는 선조들이 너무나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작은 문을 통해 드디어 비원으로 향했다. 비원은 창덕궁 정원의 이름으로 후원, 북원, 금원이라고도 불려졌다. 참고로 정원을 관리하는 관청의 이름도 비원이었다고 한다. 비원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부용지라는 연못이었다. 부용지는 정사각형모양의 연못 안에 동그란 섬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것은 천원지방설(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즉, 연못은 땅을 뜻하고 섬은 하늘을 뜻한다.)을 반영한 것이라 한다. 정원의 조그만 연못 하나에도 자연의 이치를 담아 표현하고자 한 선조들의 조경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부용지의 한 구석에는 부용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위에서 내려 볼 때에 연꽃모양이라고 한다. 부용지의 후방으로 주합루라는 누각이 보였는데 일층은 규장각으로 이층은 열람실로 쓰였다고 한다. 주합루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수문을 지나야 하는데 이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뜻한다고 한다. 주합루의 우측으로는 영화당이라는 왕실 가족의 휴식처가 있었다. 영화당은 언뜻 보기에도 여름에 맞바람으로 매우 시원할 것 같았다. 그 안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앞에 뜰의 나무들과 부용지를 바라보면 그만한 휴식이 없을 것 같다. 영화당 앞뜰에서는 과거시험이 열렸는데 이때 임금께서 친히 영화당에서 내려다 보셨다고 한다. 영화당의 앞뜰의 담을 넘으면 경복궁이라는 말에 훌쩍 넘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영화당을 뒤로하고 불로문으로 향했다. 불로문은 임금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만든 문이라고 한다. 처음에 불로문에 쓰인 한자만 보고서는 불로문이라는 것을 몰랐다. 우리가 생각하는 한자 아니불(不), 늙을로(老), 문문(門)자가 쓰여 있지 않고 고문자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들의 평균 수명이 44세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 했을 때 불로문을 좀 더 여러 개 설치해 두었어야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며 연경당으로 향했다. 연경당은 순조 때 효명세자가 사대부 양반집의 모양을 그대로 본 따 궁궐 안에 만들었다고 한다. 효명세자는 몸소 그들의 생활을 체험하고자 1년에 두세 번 방문 하였다고 한다. 효명세자는 궁궐 밖 사대부들의 생활에 호기심이 많았던 것 같다. 나 같았어도 궁궐에서만 생활 했었다면 여간 지루하고, 따분했었을 것 같다. 자연히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을 것이다. 효명세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경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개의 문중 정해진 하나로 들어가야 한다. 즉 여성은 수인문으로, 남성은 장양문으로만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수인문보다 장양문이 훨씬 크고 소슬 대문인 것으로 보아 남존여비 사상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장양문을 통해 남성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사랑채는 바깥양반이 거하는 곳으로 문이 위로 올려져 있었다. 이 문은 분합문이라 불리 우는데 여름에 맞바람을 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잔치 시 공간 활용을 위한 것이라 한다. 분합문은 들쇠로 고정되어 있었다. 사랑채의 우측에는 선향재라는 서고가 있었다. 선향이란 좋은 향기 즉 책의 향기를 뜻한다고 한다. 단순한 서고의 이름 하나에도 시적인 멋이 느껴져 우리 선조들의 운치를 다시한번 느꼈다. 선향재의 특징은 동판지붕과 위로 고정되어 있는 문이다. 이들은 모두 책을 햇빛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기와 위에 동판을 한 번 더 놓음으로서 보호하고 문의 각도를 줄로 조절해 시간에 따라 기울어지는 햇빛으로부터 보호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다음으로 여성의 공간인 안채를 둘러보았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방이 더 많았다. 그리고 밤비간이라는 부엌을 볼 수 있었다. 남성과 여성의 구별된 공간답게 책과 부엌이 성에 따른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 하였다. 우리는 연경당을 뒤로하고 내의원으로 향했다. 내의원은 궁중의 의료기관으로 남자는 의관, 여자는 의녀라 불렀다고 한다. 궁궐 안에는 건물 한개 당 측간이 1개씩 있는데 특별히 대조전에는 측간이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왕과 왕비의 소변(매화)을 매화틀에 담아 보기나인들이 내의원으로 가져와 건강상태를 체크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우리는 내의원을 다음으로 낙선재에 도착했다. 낙선재는 1847년 헌종의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진 건물이다.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와 덕혜옹주 그리고 이방자 여사가 거처하던 곳이기도 하다. 여인들을 위한 건물이라 그런지 매우 화려했다. 계단식 정원인 화계와 다른 곳과는 다른 문창살 모양 그리고 거북이 모양의 담까지 매우 장식적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꽃이 피기 전이라 그런지 매우 차분하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궁중의 모든 여인들이 그렇듯 임금님이 오지 않으면 아무리 예쁜 꽃과 화려한 장식들도 기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이제 마지막 답사지인 어차고로 향했다. 어차고는 본래 신하들이 임금을 보비기 전에 다기하던 빈청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어연과 주정소 그리고 캐딜락과 다임러, 어마차, 평교자, 초헌등이 전시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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