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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5일 일요일

몽타주의 대표인물

혁명직후의 옛 소련 영화인들인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브제볼드 푸도프킨, 지가 베르토프는 영화매체의 핵심이 편집임을 주장하는 몽타주 이론을 내세웠다. 몽타주 이론은 영화이론의 고전적 단계를 대변하는 이론이다. 그것은 영화를 하나의 프레임. 다시 말해 액자에 비유한다.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현실에 창작자의 세계관에 따라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은 편집이며 그것은 일종의 액자 만들기에 비유할 수 있다. 현실의 한 부분을 액자를 떠 만들고 그 액자는 또 다른 액자와 이어진다. 이런 액자 뜨기와 액자연결이 편집이다.
소련의 몽타주 유파가 몽타주의 쓰임새를 같은 방향에서 생각한 것은 아니다. 푸도프킨이 화면들의 연쇄/이어짐이라는 쓰임새에 따라 몽타주를 사고했다면 에이젠슈테인은 화면들의 갈등/충돌이라는 쓰임새에 따라 몽타주를 이론화했다. 두 사람은 화면과 화면의 연결/ 관계에 기초한 '관계이론'으로 몽타주를 파악했지만 그 관계가 함축하는 바는 다소 달랐다. 푸도프킨의 몽타주는 벽돌쌓기와 유사하다. 한 장면 내에서 여러 화면들은 마치 벽돌을 차곡차곡 쌓듯이 모아 이어진다. 벽돌의 배치에 착오가 있으면 집이 완성될 수 없듯이 화면들이 적절한 순서와 정확한 길이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장면의 예술적 가치를 완성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도 화면들은 이야기의 축을 따라 부드럽게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감정적 흐름의 극적 파장이 물 흐르듯 드러난다.
지금부터 몽타주의 대표적인 인물 3인 방에 대해서 예시를 통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1) 에프 쿨레쇼프(Lev Kuleshov)
몽타주에 대한 정의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의미가 어떤 한 쇼트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쇼트들의 병치에 의해 창조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본적인 편집의 원칙은 초기 러시아 영화가인 에프 쿨레쇼프(Lev Kuleshov)가 주도했던 실험이 단순하면서도 극적으로 증명한다. 그는 표정이 없는 배우의 얼굴 쇼트를 수프 접시, 관속의 여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한 아이의 쇼트와 연결했다. 그 영화를 본 관객들은 배우의 연기를 칭찬했다. 즉 그들은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배고픔, 깊은 슬픔, 기쁨을 보았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분리된 이미지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의미와 정서는 개별적인 이미지의 내용이 아니라 이미지들 서로간의 맥락에 의해 생산된다. 무표정한 그 배우의 얼굴 하나만으로는 표현적이지 않으며, 수프 한 접시는 그냥 수프 한 접시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쇼프들이 상호간의 관계에서 제시되면 남자의 배고픔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쿨레쇼프는 어떤 쇼트와 어떤 쇼트가 연결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의미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낸 것이다. 숙력된 연기자가 필요 없음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적인 요소로 배우가 과연 영화 속에 필요한가? 라는 의미를 편집에 의해 연기를 얘기할 수 있다고 증명해 냈다. 극적 감정은 병치된 숏의 연결에 의해 나타날 수 있다.

* 쿨레쇼프의 스프실험
ex) 웃는 얼굴을 보여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보여준다면..?==>
'저 사람은 배고프구나'라고 인식
ex) 웃는 얼굴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저 사람은 흐뭇하구나'라고 인식

2) V.I. 푸도프킨(V. I. Poldowski)
쿨레쇼프는 혁명 이후에 구소련의 국립영화학교에서 '쿨레쇼프공방'이라는 연구집단을 결성하고 '쿨레쇼프 효과'라는 일종의 기법 적인 실험을 행하였는데, 그것은 새로운 소재를 조립해서 작품을 생산한다는 식의 혁명 에술론적인 발상에서 비록된 것이었다. 쿨레쇼프와 V. I. 푸도프킨의 회상에 의하면 그 실험은 대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종류의 것이었다. 첫 번째로는 이를테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인위적으로 만들어가는 기법이다.

#1. 한 사람의 청년이 화면의 왼쪽에서 걸어 나온다.
#2. 한 여성이 반대쪽에서 걸어나온다.
#3. 두 사람이 만나서 손을 마주 잡는다. 청년이 손을 들어 다른 곳을 가리킨다.
#4. 넓은 계단이 있는 희고 큰 건물이 보인다.
#5. 두 사람이 계단을 오른다.

여기서 1, 2, 3은 같은 모스크바이지만, 각각 다른 장소에서 촬영되었고, 4는 미국영화에서 뽑아낸 워싱턴의 백악관의 장면이다. 그리고 5는 백악관의 계단과 닮은 계단이 있는 모스크바의 교회였다. 쿨레쇼프는 이 장면을 <우리들은 모스크바를 재건한다>라고 명명하였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적인 현실'을 몽타주에 의해 만들어 낸 것이다.
두 번째의 실험에서 쿨레쇼프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실재하지 않는 여섯을 창조하는 실험이었다고 기억한다. 그것은 생도들과 같이 했었다. 먼저 화장실에 있는 한 여성을 촬영했다. 그녀는 머리를 묶고, 화장을 하고, 스타킹과 구두를 신고 양복을 입는다..... 이번에는 여러 여성의 얼굴, 머리, 머리카락, 손, 다리 등을 각각 찍어서 그것들이 마치 한 여성인 것처럼 보이게 편집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여성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쿨레쇼프 공방은 '영화의 문장 구성 법'에 대한 시도로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통하여 '배우의 연기는 몽타주에 종속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푸도tm킨의 발언을 옮겨본다.
'쿨레쇼프와 나는 흥미로운 실험을 했었다. 우리들은 러시아의 인기배우인 모주힌(Mozhukin)이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고 있는 클로즈업 장면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장면이었다. 나는 세 가지의 다른 방법으로 같은 장면을 연결했다. 첫 번째 몽타주는 영상 바로 뒤에 테이블 위의 스프 접시가 있는 장면을 나오게 했다. 모주힌이 그 접시를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이 확실하게 나왔다. 두 번째 몽타주에는 모주힌의 표정이 죽은 여성이 쿠션에 누워 있는 영상과 연결되었다. 세 번째 몽타주에는 같은 장면이 작은 곰 모양의 이상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 소녀의 컷 다음에 연결했다. 우리들이 이 세 가지 몽타주를 관중들에게 보였을 때,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관중들은 배우의 연기를 보고 열광적으로 좋아했다. 그들은 이미 없어져 버린 스프 다음에 보이는 고통스러워하는 눈빛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죽은 여자 앞에서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에 감동하고, 놀고 있는 어린 소녀를 바라보는 밝고 기뻐하는 미소에 감탄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세 가지 장면에서 배우의 표정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푸도프킨은 몽타주를 기술론 에서 예술론으로 승화시켰지만 클레쇼프의 커트의 연결이라는 이념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의 몽타주이론은 몽타주를 적절히 사용하면 감독의 의도대로 관객은 따라간다. 'A' shot과 'B' Shot이 만나 'dB'가 된다는 것이다. (A+B=dB) 또한 푸도프킨은 단순히 장면과 한 장면과의 병치가 아니라 필름 순서에 따라 의미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푸도프킨의 몽타주에 대해 사실주의 감독들이 비판을 한다. 그 이유는 푸도프킨이 원거리보다 근거리에서 촬영을 하여 클로즈업이 많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클로즈업 때문에 영화의 사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선택을 주지 않는다는 것에 비판을 했다. 관객 스스로 영화를 보고 각기 나름대로 영화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하는데 몽타주 순서에 의해 감독의 조작된 그리고 의도된 영화로 변형되어 관객의 감독의 의도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것에 불만을 토로한다. 즉 관객들을 너무 계도하여 수동적으로 만들고 관객이 끌려오게 되어 주입식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관객스스로 비판하고 해석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사실주의라고 비판했다. 또한 현실적인 공간의 연속성을 파괴시키고 사실적인 씬 을 손상시킨다고 했다.
그러나 푸도프킨은 사실주의 감독들의 의견에 대해 반박하였다. '사실주의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연극적인 연출이 될 수밖에 없다. 영화는 본질을 포착해야지 겉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 푸토프킨의 권총실험
ex) 1번째 쇼트==> 웃고 있는 사람
2번져 쇼트==> 우왁스러운 손이 권총을 잡고 있다.
3번째 쇼트==> 깜짝 놀란 사람의 얼굴
===> 위기의 순간이라는 메시지 전달

그러나 순서를 바꾼다면?
ex) 1번째 쇼트==> 깜짝 놀란 사람
2번져 쇼트==> 우악스러운 손이 권총을 잡고 있다.
3번째 쇼트==> 웃고 있는 사람
===> 죽음을 초월한 기백이 있는 사람 혹은 물총일 수도..(의도된 편집이 새로운 메시지를 창조한다)

3)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Sergei Wildenstein)
몽타주의 혁명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등장하면서 몽타주는 또 다른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 그는 'A' Shot는 'B' Shot과 합쳐지면 'C'가 된다고 말한다. 즉 A Shot+B Shot=C 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창출해낸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고대 히랍의 사상과 헤라클레이토스에서 출발한다. 즉, '존재의 본질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라는 것이다. 변화론에 기초해서 그가 갖는 궁극적인 몽타주의 원리는 헤겔의 변증법인 정반합의 원리를 도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옳다'라는 중심적인 사상이 등장하면 그와는 반대되는 개념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 갈등하여 충돌하게 될 것이고, 계속 충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과 반 사이에서 합의를 이루어 또 다른 반대개념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또 다른 새로운 사상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반복된다고 말한다.
에이젠슈테인은 기계적인 쿨레쇼프의 몽타주 기법(A+B=dB)을 비난한다. 편집이란 것은 단순한 합일이 아닌 거친 충돌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이러한 이론은 중국의 한자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가 혁명초기에 동부전선에 복무하면서 일본어를 공부해서 약 300자 정도의 한자를 읽고 쓸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알고 있는 한문의 지식 중에서 상형문자가 합하여져서 회의문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야말로 '충돌을 통한 변증법적 도약'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자는 서로 다른 한자가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가 도출된다. 예를 들면 女(너)+子(자)=女子(좋아하다)가 되고 犬(개)+口(입)=口犬(짓다)이 된다는 것이다. 서로 상충되는 요소들의 결합에 의해 일반적인 개념이 아닌 새로운 의미, 개념으로의 전환을 말했던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는 내러티브를 이어가거나 리듬을 만들어내는 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화면들을 연결할 때마다 일종의 충돌이 일어나며 앞 화면과 이어지는 화면이 충돌할 때 거기서 발생하는 충격은 관객의 마음에 전혀 예기치 않은 갈등으로 자리잡고 이어서 그 갈등은 하나의 새로운 관념에 대한 지각을 낳는다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는 기본적으로 자극과 반응이라는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설에 기초했다. 그는 이 자극과 반응의 과정이 관객의 마음에 새로운 이념적 기반을 이뤄주기를 바랐다. 감각적 차원에서 받은 자극과 충격이 새로운 인식의 지각을 낳게 되는 과정이 곧 몽타주의 기능이다. 에이젠슈테인은 그런 몽타주의 기능을 마련하기 위해 시청각매체로서 영화의 가능한 표현영역에 모든 관심을 쏟았다.
몽타주는 화면과 화면이 연결되는 그 순간에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개념은 편집을 기다리는 화면, 즉 기독이 촬영장에서 찍어놓은 화면에서부터 시작했다. 한 화면내의 여러 조형적 차원, 이를테면 부피나 질감이나 색채와 같은 요소들은 이미 충돌과 폭발을 기다리고 있는, 몽타주를 가능케 하는 몽타주의 세포이다. 몽타주의 분자인 화면은 이미 잠재적인 몽타주를 형성하며 화면의 연결/관계는 이 잠재적인 몽타주를 확장하고 폭발시킨다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는 모든 화면의 연결이 강한 자극의 단위로 지적된 폭발물과 같다. 그래서 '영화란 관객의 마음을 가는 트랙터'라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은 프레임의 분리/선택은 모호해 보이는 현실에 명확한 의미를 지우는 방법이라고 본다. 몽타주는 그런 과정에 충격을 주는 핵심적인 장치이다. 에이젠슈테인이 생각하는 영화의 내용이란 한 시퀀스 내에 정리된 자극의 연속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최대한의 긴장을 유지시키는 것은 또한 그 반사작용으로 이념적 기반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 이념적 기반은 물론 사회주의 이념을 가리키는데 그 기반에 도달하기까지 관객은 갈등의 모형에 기초한 화면의 부분들 간의, 화면과 화면들 간의 끊임없는 충돌을 경험함으로써 의미를 지각하는 것이다.
에이젠슈테인 몽타주로는 푸도프킨과 비교하여 보다 예술적 독창성을 가지고 있으며 몽타주론은 푸도프킨과 비교하여 보다 예술적 독창성을 가지고 있으며 몽타주를 영화의 독자적 예술론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는 이 충돌이 원리를 테제와 안티테제이 상극에 의한 진 테제의 원리로 귀일시 켜, 이것을 변증법적 몽타주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푸도프킨은 몽타주를 통하여 영화의 예술적 오리지날 리티를 발견하고 에이젠슈테인은 그것에 독자적인 철학적 체계를 부여했다. 그러나 몽타주는 그 기본적 모습에 있어서 커트와 커트를 연결하는 기술적인 것이며 이것을 영화의 본질로서 절대화할 때는 당연히 기술주의 또는 형식주의가 된다. 그러나 여러 가지 몽타주론으로 하여 영화의 기술이 스스로의 기능을 인식하고 비약적 발전을 이룩한 것은 사실이며 오늘날까지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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