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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13일 월요일

일본의 사무라이

1) 사무라이의 성립
헤이안조 천황 정부의 궁정귀족들이 교토에서 세련된 문화생활을 즐기던 9세기에서 10세기경 무력의 소유를 특징으로 하는 집단이 출현했다. 그들은 ‘부시(武士)’, ‘사부라이(侍)’ 등의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사무라이’는 귀한 사람을 호의한다는 뜻의‘사부라이’가 바뀐 말이다.
귀한 사람을 호의한다는 뜻의 사무라이란 원래 전문가 즉,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 기능으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직능집단이었다. 그들은 군사전문가로서 명확한 자기정체성을 갖는 일본 최초의 사회집단이었다.
사무라이 문화가 성숙해감에 따라 그들은 용병으로서 봉사할 뿐 아니라 다른 사회집단에 비해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경쟁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상황에 힘입어 농업사회의 가장 귀중한 경제자원인 농지의 지배에 손을 뻗쳐 갔다. 그러던 중 고대 사회의 권력구조가 무너져 왕실 세력이 쇠퇴해감에 따라 일본의 중세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무라이 계급도 함께 지위가 상승했다. 사무라이는 토지를 소유하는 영주가 되고 나아가 징세와 방위의 역할을 통해 본래 귀족 소유였던 토지마저 잠식해 갔다. 11세기경 사무라이 무사들은 독자적 위계구조를 가진 정치조직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무라이가 쇼군 정부라 불리는 반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면서 공식적으로 제도화 되었다. 일본 중세는 사무라이의 권력과 그에 상응하는 문신 귀족의 몰락이 특징인 시기이다. 이처럼 사무라이 무사계급은 그들만의 권력기반과 문화, 정체성을 구축했다.
한편 조정의 귀족들은 스스로 무사 귀족 계급으로 변신하지 않았으며 사무라이도 문신 귀족이 되자 않았다. 이들은 서로 병존하는 두 개의 신분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문신 귀족은 명목상으로 전통적인 권위를 가질 뿐이었고, 문신 귀족들은 매 시기마다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자를 나라의 합법적 지배자로 인정했다. 나라의 실질적인 군사지도자는 조정으로부터 ‘세이타이 쇼군(정이대장군)’ 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고 나라를 통치하는 권한을 받았다.
이러한 사무라이의 위치는 뛰어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평화유지 능력이 바탕이 되었다. 사무라이에게 폭력은 스스로의 지배영역을 확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정당화하는 수단이었다. 사무라이는 다른 일본 사회집단으로부터 싸움을 해결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힘을 가지는 사람들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2) 사무라이의 특권
사무라이는 세 가지 특권을 가졌다.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 타이토(帶刀), 묘지(名字)가 그것이다. ‘묘지’는 성(姓)을 가질 수 있는 특권이고, ‘기리스테고멘’은 평민이 사무라이에게 누를 범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목을 벨 수 있는 특권이며, ‘타이토’는 칼을 허리에 차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이다. 이 특권들은 다른 계급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특권이다. 이렇게 전문적인 폭력 행사 능력을 사무라이가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농업부분을 그들이 지배할 수 있었던 바탕이기도 하다. 사무라이의 무(武)에 대한 신뢰와 폭력성은 일본의 고전 ‘원숭이 신의 이야기’에서도 나온다. 이야기에서 원숭이 신에게 인신공양으로 보내진 남자는 원숭이 신이 그에게 다가오자 칼을 꺼내어 위협하며 “만약 네가 신이라면, 이 칼은 너를 벨 수 없을 것이다. 시험 삼아 그 배를 찔러 볼까?”라고 말한다. 신이라 여기던 존재에도 자신에게 해가 되면 칼을 겨눌 수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자신보다 아래 계급에게는 어땠을까 생각하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특권에서 오는 사무라이 정체성의 핵심은 폭력 행사 기술의 숙련이었다. 이 점이 다른 사회집단과 그들을 구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는

일본인들은 조금만 불평이 있으면 문득 칼을 뽑아 서로 죽인다. 의심이 많아 부자간에 잠 을 잘 때도 칼을 풀지 않는다. 남자는 칼 셋을 차고 다니는데, 큰칼은 남을 죽이는 데 사 용하고, 중간 것은 남을 막는데 쓰고 작은 것은 자살용이다. 얼굴에 칼 흉터가 있으면 용 감한 자로, 머리 뒤에 있으면 비급한 자로 배척된다. 기뻐하고 성내는 빛이 당장에 나타 나고 속임수가 많다’

라고 말하며 일본의 무(武)의 폭력성을 말하기도 했다. 그런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의 특권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을 보아 일본이 사무라이의 무(武)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폭력만이 전부인 집단이라면 오랜 시간을 확고한 계급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사무라이 계급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5%~7%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다른 계급이 받아주지 않는다면 사무라이는 존재할 수 없는 계급이었다. 때문에 무사도라는 사무라이 나름대로의 도덕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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