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2008년 3월에 실시되는 대만의 총통선거는 그 선거의 규모이상으로 세계 주요 국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예측하기 힘든 선거 결과에 따라 대만문제는 단지 대만 내부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대만과 중국과의 관계, 그리고 미국·중국·대만 간의 삼각관계, 나아가 동아시아 전반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과 대만의 관계는 냉전기간 동안 서로에 대한 강력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1992년 중국과 수교한 이래 양측 간 교류는 소원해졌다. 그것은 한국의 최대 당면과제인 북핵문제의 중재자이자 한국의 제1의 무역상대국인 중국과의 밀접한 정치경제적 관계로 인해 대만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대만연구는 여전히 필요하다. 이는 경제적 상호의존과 정치적 통합 간 상관연구나, 정부가 주도하는 남북관계와 민간이 주도하는 양안관계의 상호 비교연구를 통해 우리의 대북정책이나 대중정책에 일정한 교훈과 함의를 주기 때문이다.
2. 양안관계 전개과정
양안관계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무력충돌시기(1949~1978)이다. 1949년 중국공산당은 중국인민은 반드시 대만을 해방해야 한다는 호소문을 발표했으며, 실제로 1950년 5월에 인민해방군은 하이난섬과 주산군도를 병합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한국전쟁의 발발과 미국의 즉각적인 제 7함대의 대만해협 파견으로 인해 전면적인 대만과의 무력충돌은 억제 되었다. 그러다 1, 2차 대만해협 문제가 발발하였으나 미국의 개입과 중국의 군사행동을 중단함으로써 더 이상의 확전은 없었다.
중국과 대만과의 관계는 1978년이 전환점이었는데 이후부터는 평화공세시기(1979~1998)라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이 등장한 1978년 이후 중국은 정치적 안정과 단견을 위해 대만문제에 있어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고자 하였다.
대만은 1970년대 후반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하는 외부적인 변화와 중국의 대대만정책의 변화로 이에 어떤 식으로든 대응책을 강구해야 하였다. 비록 대만은 1979년 4월 불접촉, 불담판, 불타협의 삼불정책의 불변을 강조했지만, 장징궈 총통은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로 중국을 통일한다는 <삼민주의통일중국안>을 제출했다. 이는 기존의 반공수복에서 화평반공으로의 전환을 의미하였다.
한편, 1982년 1월 덩샤오핑은 대만정책에 있어서 이정표적인 ‘일국양제’ 구상을 발표했다. 대만문제는 국내문제이며 대만은 중국의 지방특별행정구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1983년 덩샤오핑은 대만문제의 핵심은 조국통일이기에 정치제도에 상관없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한다면 부분 자치와 권리를 허용하고, 서로 무력을 사용해 통일을 시도하지 않으며 평화적인 방식으로 양안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는 <덩샤오핑의 6개항의 원칙>을 발표하였다. 즉, 일국일제로 가기 위한 중간단계로서 일국양제는 대만의 삼불정책 포기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1984년 5월에 양국일제를 정식으로 중국의 대만정책으로 채택했다.
이에 대만도 1986년에 계엄을 해체하는 동시에 중국의 비정치출판물 및 대륙과의 간접무역과 대만 기업의 대대륙 간접투자를 허용하는 등의 조치를 단행했다. 1988년 7월 리덩후이가 총통이 된 이후에도 국민당은 반공산주의와 삼불 정책의 수호를 여전히 재결하면서 시대상을 반영해 친척간 상화방문과 서신교환을 허용하는 <중국국민당의 현단계 대륙정책안>을 통과시켰다.
1989년 장쩌민 국가주석은 국경 40주년에서 평화통일 방침과 ‘일개국가, 양종제도’ 구상을 제출했다. 1991년 12월 중국은 대만과의 민간교류를 담당하는 해협양안관계협회를 설치하였다.
한편 대만은 1990년 10월 총통부 산하에 국가통일위원회를 설립해 총통의 대륙 정책을 자문하게 하였으며 그해 11월 행정원 대륙위원회와 재단법인 해협교류기금회를 설치하였다. 1991년 2월 국가통일강력을 제정하였고, 5월 공산당과의 내란상태 종식을 선언하였다.
1993년 4월 중국은 홍콩 특별행정구기본법과 마카오 특별행정구기본법에 의거해 대만문제 해결법을 찾고자 하는 『대만문제와 중국통일』백서를 발간하였다. 즉, 대만은 자체 독립적인 사회경제제도를 그대로 가지며, 입법권, 사법권을 향유하며 군대도 보유한다. 중국은 관리와 군대를 파견하지 않고, 대신 국제사회에서는 중국만이 대표권을 가진다. 이어 장쩌민은 1995년 춘철 <장쩌민의 8개항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제3세대 지도부의 대만구상으로서 몇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데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면서 정치와는 별개로 경제협력을 가속화하며 무력사용은 대만독립의 분리세력에게만 해당하되 대만인민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대만문제가 무기한 계속될 수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장쩌민의 8개항 원칙의 발표 후, 리덩후이 총통은 1995년 4월 <리덩후이의 6개항 원칙>을 발표했다. ‘양안이 분리 통치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통일을 추진한다; 중화문화를 기초로 양안교류를 강화한다; 양안 경제관계를 증진한다; 동등한 자격으로 국제기구에 가입한다; 평화적 수단으로 분쟁을 해결한다; 양안은 공동으로 홍콩과 마카오의 번영과 안정에 기여한다’는 것인데, 양안이 분리통치되고 있는 현실속에서 대만은 중국에 예속되지 않는 정치실체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후 대만의 중국 정책은 급격하게 변하였다. 이전에는 형식적으로나마 통일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분리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따라서 1999년부터 그 이후를 분열갈등기(1999~현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리덩후이 총통이 1999년 5월 전중국 영토를 7개의 지역으로 분할되어야 한다는 7개의 지역론을 발표한 데 이어, 7월 ‘대만은 중국과 별개의 국가’라는 양국론을 발표한서 양안 간 긴장이 고조되었다.
2000년 3월 민진당의 천수이볜 후보가 당선된후 양안관계는 본격적인 갈등기로 진입했다. 천 총통은 취임식에서 “대륙이 공격하지 않는다면 대만 역시 대만 독립 불선포, 국호의 불변경, 2개의 중국 원칙 헌법 불삽입,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 불실시, 국가 통일강령과 국가통일회의 폐지 등 다섯가지 조치를 취하지 않겠다”는 ‘4불1무’원칙을 발표했으나 2002년 8월 천 총통은 ‘일변일국론을 제시하였다.
이에 중국은 크게 강경책과 유화책의 두 가지 방향으로 대응하였다. 유화책으로는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2005년 3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후진타오의 4개항 원칙>을 제시했다. 이는 ‘하나의 중국’ 원칙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평화통일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대만 인민에 희망을 건다는 방침은 결코 바꾸지 않을 것이다; 대만 독립 분열주의세력과의 타협은 없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강경책으로는 상기 회의에서 법리적으로 대만의 독립 시 무력 사용을 정당화 하는 반분열국가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천수이볜은 2006년 국민투표를 통해 신헌법으로 개정한 후 2008년에 정식으로 신헌법을 공포·시행에 들어갈 것이라는 일정을 밝혔다. 이를 통해 대만을 ‘정상적이고 완전한 국가’로 거듭날 것임을 공언했다. 최근 2007년 3월 천 총통은 ‘대만은 독립해야 하고 이름을 바로 잡아야 하며 신헌법이 필요하고 발전이 필요할 뿐 좌우노선의 문제가 없다’의 ‘4요1무’론을 선언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