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yReadMore##

이 블로그 검색

2010년 12월 4일 토요일

중국 언론 통제:“10억인의 대뇌를 하나로”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중국 전역을 휩쓸던 70년대,
“10억인의 대뇌를 하나같이”, “마오(마오쩌둥) 주석의 말을 듣고,
마오 주석의 지시에 따라 일을 한다”는 선전 문구가 가득한 속에서도
‘미국의 소리’와 ‘BBC’를 몰래 듣는 중국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서서히 민주와 자유에 눈을 떴고 중국 민주의 아버지라 불리는 웨이징성 등이 탄생했다.
또 일부는 아무도 없는 새벽 담장에 ‘공산당을 타도하자’는
표어를 붙이는 등 분노와 희망을 표출하기도 했다.

당시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시대였다.
단지 공산당을 의심하는 것만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장즈신은 처형 전 공산당 타도 문구를 외칠 것을 우려한 당국에 의해 기도가 잘렸다.
리지우랜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신장을 적출당한 뒤 총살당했다.
단지 공산당의 의심하고 공산당의 의견과 다른 말을 했다는 이유다.
극심한 공포 속에서 중국인들은 공산당이 지정한 8개의 모범극과 소설을 보고,
마오쩌둥의 어록을 외우면서 자랐다.


‘천안문 민주화 운동’ 기념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는
‘중국 민주의 아버지’ 웨이징성(魏京生).
그는 1978년 베이징 시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자보 릴레인 ‘베이징의 봄’을 주도했다.
이후 체포돼 14년간 복역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베이징의 봄에서 지하 간행물까지

문화 대혁명의 악몽이 끝난 직후인 1978년 11월 믿기지 않는 일이 베이징에서 발생했다.
베이징 시단(西單) 체육관을 비롯한 일대 담장 100여 미터에
중국 공산당을 성토하는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점점 대자보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내용까지 등장하는 등 수위가 높아졌다.
하지만 1979년 12월 당국에 의해 페쇄됐다.
일년 남짓한 이 기간을 흔히 ‘베이징의 봄’이라고 하며,
당시 시단 담장에서 활약한 웨이징성, 쉬원리, 왕쥔타오, 후핑, 려우칭,
런완딩은 대부분 체포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문화대혁명의 실패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정부는 개혁개방의 길을 택한다.
이와 함께 잠시 언론 통제를 완화했고, 89년 천안문 사태 이전까지의 80년대는
중국 언론의 최초이자 마지막 ‘황금기’였다.
하지만 당시에도 공산당의 치명적인 치부를 드러낸 보도에 대해서는 엄격한 통제가 뒤따랐고,
이는 ‘지하 간행물’의 탄생을 야기했다.

뉴욕의 한 도서관에서 당시 중국의 지하간행물 리스트가 발견됐다.
리스트에는 《원명원의 술고래 시집》, 《팡페이 시선》의, 《타향 사람》,
《북문 잡지》, 《경향》, 《발견》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찾으신거 아닌가요?